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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어릴 적 주방 한쪽에는 늘 낡은 노트 한 권이 놓여 있었습니다. 투명한 비닐 커버가 씌워진 그 노트는 군데군데 국물 자국이 배어 있고, 양념 얼룩이 마른 흔적도 가득했습니다. 바로 엄마의 요리 노트였지요. 어릴 땐 무심히 넘겼던 그 노트가 이제는 그 어떤 요리책보다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그 안에는 단순한 조리법을 넘어서, 우리 가족의 시간과 사랑, 정성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매 끼니마다 음식을 만들고, 틈날 때마다 노트를 꺼내 메모를 더하곤 하셨습니다. '무는 얇게 썰어야 국물이 맑아진다', '된장은 미리 풀어두면 맛이 깊어진다', '이 반찬은 아버지가 특히 좋아하셨음' 같은 문장들이 정성스레 적혀 있었지요. 요리는 단지 끼니를 해결하는 수단이 아니라 가족의 컨디션을 살피고, 감정을 표현하고, 추억을 만들어가는 따뜻한 언어임과 동시에 인생 레시피였다는 것을 그 노트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만년필로 쓴 노트의 글씨는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가끔은 바쁘게 쓴 듯 휘갈겨 있었고, 어떤 날은 또박또박 써 내려간 정성이 느껴졌습니다. 손글씨는 그날의 감정과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엄마의 요리가 주는 깊은 맛의 또 다른 비결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만년필로 다시 써 내려가는 인생 레시피
저는 엄마의 요리노트를 참고해 요리를 자주 합니다. 어느날은 종이 위에 빼곡하게 적힌 글씨를 바라보며 문득 ‘이걸 내 손으로 다시 써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꺼내 든 것이 만년필이었습니다. 마음을 담아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가는 과정 그 자체가 감정의 여운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손글씨를 따라 적어가는 일은 단순한 필사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시간 여행을 하듯, 엄마와 함께 부엌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만년필의 펜촉이 종이를 천천히 스치며 남기는 잉크 자국 속에는 엄마의 숨결, 그날의 공기, 조용한 부엌의 풍경까지 담겨 있는 듯했습니다. 특히 브라운 계열의 잉크를 사용할 때는 왠지 된장찌개 냄새가 나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이렇게 다시 쓴 레시피는 그저 요리법을 정리한 것이 아니라 감정이 담긴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오히려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고 내가 자라온 환경과 가족의 온기를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손글씨 속에 담긴 세대의 기억
요즘은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검색만 하면 레시피 영상과 블로그 글이 쏟아지지만, 그 속엔 ‘엄마의 말투’, ‘우리 집 식탁 분위기’, ‘특별한 날의 이야기’ 같은 것은 담겨 있지 않습니다. 손글씨로 남긴 요리 노트는 그런 디지털 정보로는 대신할 수 없는 감정의 기록입니다. 그래서 더욱 소중하고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엄마의 요리 노트를 다시 써 내려가며 저는 자연스레 그 시절을 회상하게 되었습니다. 비 오는 날이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부추전이 떠오르고, 겨울이면 팥 칼국수를 끓이던 냄비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 안에는 요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의 감정과 기억이 함께 적혀 있었습니다.
손글씨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만년필로 써 내려간 레시피는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시간과 감정을 온전히 담아낸 ‘삶의 조각’인 것이죠. 그리고 그런 조각들을 다시 꿰어 맞추는 작업이 바로 요리 노트 필사였습니다.
나만의 레시피북, 가족의 시간을 담다
처음에는 엄마의 글씨를 옮겨 쓰는 것만으로도 벅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저만의 요리 노트도 함께 채워가기 시작했습니다. 가족들에게 해줬던 반찬, 친구들과 나눴던 특별한 요리, 실패한 레시피에 남긴 웃긴 메모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삶의 기록으로 남고 있습니다. 요리 하나하나에 담긴 이야기를 써 내려가다 보면 우리 집만의 인생 북이 되어갑니다. 만년필을 사용하면 글씨에 힘이 실리고, 글자 하나하나에 나의 감정이 담깁니다. 특히 조용한 저녁에 잉크를 리필하고, 빈 종이에 펜을 올려 첫 글자를 쓸 때의 설렘은 경험해 본 분들이라면 아실 겁니다. 요리와 필기는 닮았습니다. 둘 다 시간을 들여 정성껏 만들어가는 일이니까요. 이렇게 쓰인 노트는 언젠가 나의 아이에게도 전해질 수 있겠지요. 그때가 되면 그 아이는 나의 손글씨를 보며 ‘우리 엄마는 이런 요리를 했구나’, ‘이 음식을 할 때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하고 생각하겠지요. 그 상상을 하면, 오늘도 자연스레 만년필을 꺼내 들게 됩니다.
잉크 냄새에 담긴 감정의 잔상
만년필의 잉크 냄새는 저에게 아주 특별한 감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매번 잉크 뚜껑을 열고 펜촉을 닦을 때면, 왠지 모를 따뜻한 기분이 들곤 합니다. 어쩌면 그건 어릴 적 주방에서 맡았던 밥 짓는 냄새, 된장국이 끓던 냄비의 김, 겨울 아침의 조용한 부엌의 공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잉크의 냄새에 그 기억이 겹쳐져서 지금의 제 감정에 연결되는 듯합니다. 필사를 하다 보면 단순히 요리만 떠오르는 게 아닙니다. 엄마의 목소리, 식탁에 앉아 있던 아버지, 반찬을 골라 먹던 동생의 얼굴이 하나씩 떠오릅니다. 한 문장을 쓸 때마다 기억이 하나씩 되살아나고, 종이 위에는 글자뿐 아니라 제 감정이 함께 적혀 갑니다. 이건 그 누구의 레시피북에서도 볼 수 없는, 나만의 특별한 문장들입니다. 이렇게 다시 쓴 노트는 단순한 요리책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한 가정의 이야기, 한 세대의 기억, 그리고 한 사람의 정성이 담겨 있습니다. 손으로 쓰는 삶은 결국 누군가를 생각하며 천천히 살아가는 삶이라는 걸, 만년필과 엄마의 요리 노트를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손글씨로 남기는 사랑의 방식
우리는 빠르게 소비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럴수록 더 소중한 것은 느리고 따뜻한 기록입니다. 만년필로 써 내려간 요리 노트 한 권은 사랑을 전하고 기억을 간직하는 방식입니다. 엄마가 우리를 위해 매일 밥을 지었던 것처럼, 저도 누군가를 위해 정성스레 음식을 만들고 그 기록을 남깁니다. 누군가에게는 작은 습관일 수 있지만 손으로 쓰는 이 기록은 언젠가 누군가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가장 진한 사랑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엄마의 요리 노트를 따라 써보며 저는 매번 한 가지를 떠올립니다. ‘사랑은 결국, 정성스레 써 내려간 흔적 속에 담긴다’는 사실을요. 오늘도 저는 조용히 만년필을 꺼내고, 엄마의 레시피를 한 줄씩 다시 써 내려갑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이 느려지고,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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